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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격.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속담이 아닐까. 울상을 지은 순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제발 있어라. 제발. 가방안에 들어있는 서류더미를 아무리 헤쳐보아도, 찾는 물건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했다. 어디에 둔거야. 항상 가방 안쪽에 있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여기 말고는 있을데가
없는데. 입술을 깨문 순영이 서류를 모두 빼내어 가방을 뒤집어 털어보아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게 언제였더라. 순영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지난주였나, 미팅이 있어 외부에 나간 적이 있는데 시간이 남아 카페에서 USB에 담긴 데이터 정리를 한 적이 있었다. 잠깐 한다는게 시간이 꽤 지나있어 급하게 짐을 챙겨 자리를 벗어났는데, 아마 그 때 잃어버린 것 같았다.
“권대리. USB 찾았어?”
“아뇨. 잃어버렸어요.”
“큰일이네. 수요일까지 보고하라 했잖아. 다른데에 백업 안해놨어?”
“해놨죠. 해놨는데, 죽었어요.”
순영은 허탈하다는 듯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어제 회의시간에 보고하라고 지시받은 자료를 마무리 짓기위해 파일을 열었지만, 가장 최근에 입력했던 데이터들이 전부 날아가있었다. 지시를 받고 급하게 정리한 데이터도 아니고 한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정리해온 데이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놓고다니지 않는 이상 날아가는게 힘들텐…. 아. 순영은 탄식을 내뱉었다.
며칠 전에 USB에 있던 파일들을 컴퓨터로 옮긴적이 있는데, 그 때 보고해야 할 파일이 섞여있어 덮어쓰인 것 같았다. 어차피 잃어버린 USB는 되찾을 가망이 없어 서랍에 넣어두었던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하지만 왠걸. 외장하드는 컴퓨터에 연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요상한 소리를 내며 운명을 달리했다. 전원이 꺼져가는 모습이 누가 슬로우모션이라도 걸어놓은 것 처럼 순영의 눈에 천천히 담겼다. 최후의 보루마저 자신의 눈앞에서 멀어졌다. 다시금 참담해져 오는 기분에 순영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요일이라고 해도 오늘이 화요일이니 당장 내일인 셈이다. 지금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데이터가 60%쯤 되니까, 거의 반절은 날린 셈이네. 맥이 풀리는 기분에 한숨을 내쉰 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바람좀 쐬고 올게요.”
“그래. 다녀와.”
축 늘어진 어깨가 딱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자신도 데이터를 날린적이 몇 번 있어 순영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명욱은 파티션을 두드리는 손길에 시선을 옮겼다.
“한대리님.”
“어, 전대리. 왜?”
“지난번에 부탁하셨던 자료요. 몇 개 추려봤거든요.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고마워. 내가 확인 해보고 말해줄게.”
“네. …근데, 권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아아. 수요일까지 보고해야하는 자료가 있는데 그걸 날렸어.”
“중요한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지. 2년동안 꾸준히 정리해서 보고하던 자료니까.”
“…”
“아무튼 안됐어. 오늘 고생 좀 하겠는데.”
“그렇겠네요. 참, 자료 확인해보고 문제 있으면 말해주세요.”
명욱에게 자료를 넘긴 후 걸음을 옮기던 원우의 시선이 한동안 순영의 자리에 머물렀다.
***
담배 땡긴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옥상 난간에 기댄채 의미없이 시선을 두던 순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비흡연자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담배가 피고싶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순영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기분에 셔츠 제일 위에 있는 단추 하나를 풀었다.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있다가도 다시 채워넣어야 할 데이터들을 생각하면 막막한 기분이 든 탓이다. 그래도 바람 쐬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안그래도 그래야지.
누가봐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온 순영의 책상 위에 초콜렛이 놓여있었다. 이게 뭐지? 회사에서 먹는 간식이라고는 탕비실에 있는걸 먹는게 전부라 따로 사놓은 간식은 없었다. 사무실 내부를 둘러봤지만 딱히 저에게 이걸 주었을 만한 인물은 없어보였다. 나 먹으라고 놓아두긴 한건가? 초콜렛을 집어 앞뒤로 살펴보던 순영의 눈에 포스트잇이 들어왔다.
「우울할 때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진대요.」
꾹꾹 눌러 쓴 듯한 글씨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옆자리에 앉은 명욱이 놓아둔건가 싶었지만 명욱의 성격상 직접 줬으면 줬지 메모를 남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혹시…. 순영은 원우를 바라봤다. 애매한데. 원우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 이라고는 자신의 뒷모습이 전부일텐데, 제 기분에 대한 파악이 가능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음. 손에 들린 초콜렛을 바라보며 짧게 고민하던 순영은 곧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권대리님. 저 먼저 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어느새 퇴근시간을 훌쩍 넘은 시간이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같은 팀 동희마저 사무실을 벗어났다. 줄곧 모니터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을 바라본 탓에 뻑뻑한 눈을 문지르던 순영이 기지개를 켰다. 오랜시간 앉아있어 그런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벌써 여덟시네. 입력한 자료들을 훑어보니 오늘 내로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자에 기대 몸을 늘어트리고 있던 순영은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회사 사람들은 진작에 퇴근해 다시 사무실에 들어올만한 사람이 없었다. 파티션 바깥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가, 전원우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안 갔나? 아닌데. 분명 아까 나가는거 봤는데.
“전대리님 퇴근한거 아니였어요?”
“아. 뭘 좀 두고가서요.”
“아아.”
“권대리님은 아직 퇴근 안했어요?”
“네. 해야할게 좀 남아서요.”
내일 보고들어가야 하는게 있는데 실수로 날렸거든요. 저도 모르게 투정부리듯 말하자 원우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다. 그 웃음에 왠지 민망하진 순영이 귀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랬어요? 얼마나 남았는데요?”
달래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묻는 어조에 순영의 손끝이 간질거렸다. 다정하게 부딪혀오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순영이었다. 거의 다 했어요. 내뱉어진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도 같았다. 원우는 앉아있는 순영의 옅은 붉은빛이 도는 귀 끝을 바라보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뇨. 좀 급한거라 아직….”
내일 보고 들어가야 하는건데 마음이 급해 저녁을 먹었을리가 없었다. 저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영에게 다가갔다. 잠시만 기다려요. 머리 위로 떨어진 말에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원우는 사무실을 벗어났다. 잠시만? 가겠다는 말을 잘못한 거 아닐까? 순영은 원우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원우가 다시 들어왔다. 순영은 원우를 의문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향하는 순영의 시선을 읽은 것 인지 원우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내보였다.
“도시락 사왔어요. 밥 먹고해요.”
“어, 괜찮은데….”
“저도 아직 저녁식사 전이고 해서 사온거예요. 얼른 와요.”
순영은 쇼핑백을 든 채 회의실로 향하는 원우의 뒤를 따라갔다. 스위치를 누르자 깜깜했던 회의실에 불이 들어왔다. 원우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쇼핑백에서 도시락 두 개를 꺼내자 순영은 그제서야 허기가 밀려왔다.
“어서 앉아요.”
“네.”
원우의 맞은편에 앉은 순영은 일회용 젓가락의 포장을 뜯었다. 잘 먹겠습니다. 원우와 순영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내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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