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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순영]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14
w. 소라
정비소에서 차를 가져온 순영은 원우와 만나기로 한 편의점 앞에 잠시 정차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할까 봐 급히 오느라 카 오디오를 켜지도 못한 차 안은 비상등이 깜빡이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제야 한숨 돌린 순영은 룸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창문을 조금 열어둔 탓에 머리가 흐트러진 것 빼고는 집을 나설 때와 똑같았다.
거울에서 시선을 뗀 순영은 제 옷차림을 살핀다. 첫 데이트라 그런지 자신이 봐도 퍽 신경 쓴 테가 났다. 원우는 어떤 차림일까.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사내에 복장과 관련된 규정은 없다. 다른 부서 사람들은 격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지만, 자신과 원우는 영업부인 만큼 외근이 잦은 탓에 주로 정장을 입었다. 가끔 주말에 출근하거나, 야유회 같은 행사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눈여겨보지 않은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데이트하는구나. 어제는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고, 오늘은 늦지 않게 차를 찾아야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데이트에 대한 실감도 별로 없었고 설렘도 적었는데. 갑자기 새삼스레 심장이 울렁거리며 긴장감이 몰렸다.
윽. 앓는 소리를 내던 순영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 문 앞에서 원우가 허리를 조금 굽힌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차의 잠금장치를 푼 순영은 룸미러로 재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살폈다. 한 가닥 삐져나와 있던 머리카락을 자연스레 정리하며 옆을 바라보자 원우가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일찍 왔네요?”
원우가 순영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시계를 바라보자 만나기로 했던 2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대리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네. 준비는 일찍 끝났는데, 집에서 기다리려니 애가 타서요.”
원우는 생각보다 감정표현에 가감이 없었다. 순영도 딱히 감정을 숨기거나 하는 타입은 아닌데, 원우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표현할 때마다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꼼실거리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른 순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을 건넸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전 순영 씨랑 하는 거면 다 좋아요.”
“…그게 아무거 나랑 다른 게 뭐예요.”
원우는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면역이 없는 순영은 부러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한껏 풀어진 상태였다.
“영화 보러 갈래요? 전대리님 지난번에 보고 싶다고 한 거 개봉했던데.”
“좋아요.”
“예매 안 했는데 자리 있겠죠?”
“제가 찾아볼게요.”
원우가 좌석정보를 찾으려 휴대폰을 꺼내 듦과 동시에 순영의 차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
혹시나 하던 게 역시 나가 되었다. 주말의 영화관은 늘 사람이 붐비기 마련이었다. 보려던 영화의 가장 가까운 시간은 매진이었다. 다음 시간을 보려 했지만, 그것조차 이미 좋은 자리가 다 빠졌거나, 떨어져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 순영은 허탈한 소리를 내며 상영 시간표를 바라봤다. 어제 미리 예매해 놓을 걸 후회해도 없던 자리가 생겨나진 않는다.
“미리 예매할걸 그랬나 봐요.”
“그러게요.”
자기가 먼저 데이트하자고 했으면서, 뭘 할지 정해놓지도 않았다. 평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주말에다가 즉흥적으로 온 영화관에 남는 자리가 있을 리 없다. 미안해요. 순영이 중얼거리자 원우가 시선을 돌린다. 아랫입술을 조금 내민 채로 속상한 표정을 한 얼굴을 보자 설핏 웃음이 났다. 귀여워.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말은 아닌 듯해, 원우는 그 말을 혀 밑에 묻어두었다.
“괜찮아요. 뭐할지 생각 안 해온 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영화 말고 다른 거 할까요?”
다른 거라고 해도 딱히 할만한 것도 없었다. 밥을 먹기엔 이미 둘 다 식사를 하고 나온 참이었고, 쇼핑하자니 첫 데이트를 좀 더 그럴듯하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아니예요. 이왕 온 김에 영화 보고 가요.”
“그치만 자리가 없잖아요.”
“다른 거 봐도 돼요. 지금 당장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
“다음에 같이 와서 보면 되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
“그리고…, 난 순영씨랑 하는 거면 뭐든 좋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요. 따지고 보면 제 잘못도 있는 거잖아요. 자신을 위로하듯 덧붙여진 말에 순영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가까운 시간이…. 이것 밖에 없네. 이거 괜찮아요?”
“네. 그걸로 봐요.”
더는 어물쩍거릴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답한 순영은 뒤늦게야 원우가 보자고 한 영화 포스터를 확인했다. 헉. 짧은 숨이 절로 들이켜지는 포스터였다. 순영은 다급하게 원우를 부르려 했다.
“두 분이시고, 상영관은 3관으로 가면 되세요. 시작 10분 전이니까 서둘러 입장해주세요.”
“네.”
서두르는 건 원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짧은 사이에 결제까지 마쳤다. 원우의 손에 들린 표를 바라보는 순영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
영화는 올여름에 개봉해서 400만 관객을 넘긴 영화였다. 포스터 하단에 8월 개봉이라고 쓰여 있는 거 보면 거의 두 달 동안 상영관을 지킨 셈이다. 별점도 좋았고, 평론가들의 평도 공포영화치곤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공포영화라는 점이었다.
순영은 공포영화를 못 보는 건 아니었다. 보면서 무섭긴 해도 그래 봤자 영화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집에 가서가 문제였다. 씻을 때도, 자려고 누웠을 때도 영화의 장면들이 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겁이 없다 해도 적막이 흐르는 집에 있다 보면 영화에서 봤던 배우의 모습이라던가, 상황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온갖 상상을 다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라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봐왔던 것들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쓸어내리던 순영은 한참 광고가 나오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봤다. 아직 영화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은근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 지금이라도 못 보겠다고 말할까. 옆자리에 앉은 원우를 힐끔 바라보자 태연한 옆모습이 보인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순영은 왠지 모를 오기 같은 게 생겼다. 오기라기보다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나도 아무렇지 않아. 속으로 되새기며 휴대폰을 꺼내 영화 이름을 검색해 평을 살핀다. 아무리 공포영화라 그래도 허술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눈을 또렷하게 뜨고 열심히 평을 보는데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된 것이다.
**
어두운 복도를 여자가 걷고 있다. 뚜벅, 뚜벅. 조용한 복도에 오직 여자의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이다. 카메라가 긴장한 듯한 여자의 옆모습을 담는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빠진 어깨가 편하게 내려앉는다. 이마에 베인 식은땀을 훔쳐내던 여자의 움직임이 멎는다. 다음 장면은 무서울 거라는 판단을 내린 순영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상영관에도 비명이 울린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소리만 듣던 순영은 옆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실눈으로 원우를 바라본다. 지금 한참 무서운 장면만 나오고 있는데 뜬금없는 웃음소리가 의아스러웠다.
“무서워요?”
눈이 마주친 원우가 느슨하게 웃으며 묻는다. 봤구나. 순영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긴장감에 굳어있던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려 한 탓이다.
“…별로요.”
원우에게 약한 인상을 주기 싫어 순영은 뻗댔다. 공포영화를 못 보는 게 약함과 직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원우는 순영을 바라보다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에 쏙 들어오는 순영의 손이 촉촉했다. 이만큼 긴장했구나. 상영관에 들어올 때부터 조금 질린듯한 순영의 낯빛이 단순히 조명 탓이라 생각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순영의 긴장을 덜어낼 생각으로 가볍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나갈까요? 원우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순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볼만해요. 자신과 눈을 짧게 맞추던 순영이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
상영관 출구를 벗어나는 사람들 틈 사이에 원우와 순영이 섞여 있었다. 남은 팝콘과 콜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영화관 로비로 걸어가는 둘은 여전히 손을 맞잡고 있었다. 순영은 영화의 여파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원우는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상영관에서 촉촉했던 손이 시간이 지나자 산뜻해졌다. 영화가 끝나니까 긴장이 풀리긴 한 모양이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뺐다 하며 가볍게 장난을 치던 원우가 순영에게 물었다.
“배 안 고파요?”
“고파요.”
“전골 먹으러 갈래요? 근처에 맛있게 하는 집 아는데.”
“좋아요. 얼마나 걸려요?”
“걸어서 10분 정도?”
멀티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원우가 앞장서고 순영이 뒤따른 탓에 순영의 키가 원우보다 조금 커져 있었다.
“전 대리님 키가 작아졌네요.”
뜬금없는 말에 원우가 순영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한 칸 위에 서 있어 확실히 평소보다 눈높이가 높긴 했다. 상영관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제빛을 되찾았다. 기분이 좋은 듯 순영이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던진 농담에 원우가 미소 지었다.
“순영씨는 다시 돌아왔네요.”
“아쉽다.”
“왜요? 다시 작아져서?”
“네. 조금만 더 컸으면 비슷했을 텐데.”
에스컬레이터가 1층에 다다르자 순영의 눈높이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조심스레 맞잡고 있던 손을 뺀 원우가 출구를 향해 걸으며 자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 원우야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순영은 아닐 터였다. 손을 잡는 것도 좋지만, 자신은 순영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어있는 것도 좋았다.
둥근 어깨를 손으로 감싸듯 쥐자 순영이 원우를 바라본다. 원우가 조금 위에 있는 탓에 시선을 높이는 순영의 눈이 동그래진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귀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눈에 손끝이 간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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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를 안한지 오래됐더니.. 감이 안잡혀서.. 늦었습니다... (쭈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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