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홋/원순]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11
[원우순영]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11
w. 소라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순영의 눈이 시계를 확인한다. 출근하자마자 쌓여있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1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잠시도 쉬지 못한 눈이 따끔거리며 피로를 호소했다. 굳어져 있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순영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업무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쌓이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흐릿해지는 눈가를 꾹꾹 누르던 순영이 몸을 일으켜 탕비실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몸이 늘어져 커피를 마셔야 하나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반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걸음을 멈춘 순영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열려있던 문틈 사이로 들어오던 사무실의 소음들이 뚝 멈췄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원우가 뒤를 돌아본다.
“커피 마시게요?”
“고민 중이에요.”
“여기까지 와놓고?”
“그러게요.”
순영이 웃으며 말하자 원우의 눈 또한 휘어진다. 빈속일 테니까 커피 마시지 말고 차 마셔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커피 캡슐이며 온갖 차 종류가 늘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몸을 돌린 원우가 순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손끝이 간질거려오는 느낌에 순영은 괜히 손만 쥐었다 폈다.
원우의 말대로 점심에 가까워진 시간이라 커피를 마시긴 애매했다. 못 마실 것도 없지만, 빈속에 들이붓는 커피가 얼마나 위를 아프게 하는지 아는 순영은 커피 대신 낱개로 포장된 티백을 고른다.
차를 좋아하는 직원이 꽤 되는 탓에 탕비실에는 여러 종류의 차가 구비되어 있었다. 차 종류라곤 평생을 녹차나 둥굴레차밖에 몰랐던 순영에겐 고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티박스 앞에 조금 오래 서있는다 싶었는지 테이블에 떨어져 있던 원우가 다가왔다.
“고르는 게 어려워요?”
귀 바로 옆에서 닿아오는 낮은 음색에 순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원우가 순영의 뒤에 바짝 선 채 고개를 내려 말한 탓이었다. 귀 끝에 닿았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순영을 간지럽힌다.
“어, 네.”
얼굴을 살짝 돌려 원우를 바라보니 제 앞에 놓인 티박스를 보며 함께 고민하는 눈치였다. 괜히 저만 의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순영은 헛기침을 하며 티 나지 않게 몸을 움직였다. 다시 시선을 돌려 애꿎은 티박스만 뒤적거린다. 영어로 뭐라 쓰여 있긴 한데 어떤 게 어떤 것인지 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니, 알았더라도 가까이 붙어있는 원우 때문에 제대로 고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게 좋을까.”
조금 멀어졌던 몸이 다시 가까워진다 싶더니 시야에 원우의 손이 들어온다. 원우는 테이블을 손으로 짚은 채 티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보면 원우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자세였다. 아. 너무 가까워. 귓가에 원우의 숨결이 스친다. 순영은 옅은 흥분감에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이거 어때요?”
테이블을 짚고 있던 손이 티백 하나를 골라낸다. 자신의 시야 안에서 흔들리는 티백을 받아낸 순영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컵을 꺼낸다. 원우의 품에서 벗어나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어깨가 절로 풀어지며 얕은 한숨이 나왔다.
묘한 공기로 가득 차 있던 탕비실은 순영이 물을 받는소리만이 울렸다. 컵에 따듯한 물이 어느 정도 차자 정수기에서 컵을 떼어내 티백을 넣었다. 투명했던 컵 안이 점점 갈색빛으로 물든다.
순영이 몸을 돌리자 시야에 원우의 웃는 얼굴이 들어온다. 순수한 호의만이 담겨있는 미소에 왠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이 든다. 둘이 같이 있을 때마다 자신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항상 먼저 분위기를 이끌어놓고 막상 보면 원우는 한 발짝 물러난 태도를 보였다.
조금 삐뚜름한 눈을 한 채 원우를 마주 봤다. 여전히 웃고 있는 원우가 다시 손을 뻗어 순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귀여워. 흩어지듯 내뱉는 말에 순영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린다. 흐응. 순영의 입에서 불만스러운 소리가 나왔다.
머리카락에 닿아있던 손이 조금씩 멀어진다. 어떻게 할까. 순영은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컵의 표면을 두드렸다. 제자리를 찾은 원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을 받느라 원우의 품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정수기가 근처에 있던 탓에 여전히 가까운 거리였다.
순영은 호기롭게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좁아 든다. 원우의 키가 조금 더 큰 탓에 순영의 시선이 올라간다. 원우와 눈이 마주친다. 까만 눈동자가 저를 바라본다. 순영은 의도적으로 눈가를 나른하게 풀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혀를 내어 자신의 입술을 적시듯 핥는다. 원우의 시선이 순영의 젖은 입술에 머무른다.
씨익.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이 호를 그리더니 치아를 드러내며 장난스레 웃는다. 자신의 입술에 머무르는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탓이다. 뜨겁고, 색정이 담긴 시선을. 귀여워. 아까 원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속으로 되뇐다.
색스럽게 조여들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순영은 고개를 들어 지척에 있는 원우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쪽. 촉촉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다. 원우를 바라보자 드물게 당황스러운 빛을 띠고 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오호. 순영이 입술을 둥글게 말아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쪽. 원우의 반응을 다시 살피다, 쪽. 한 번 더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횟수가 길어질수록 원우의 당황은 흐릿해져 갔다. 짧게 닿기만 하고 본격적이지 않은 입맞춤에 감질이 난 원우가 손을 들어 순영을 끌어당겼다.
“그럼.”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점심시간에 봐요.”
원우의 손이 닿을 즈음 순영이 몸을 물렸다. 장난기가 가득했던 얼굴은 어느새 샐쭉 웃고 있다. 하. 원우에게서 얕은 탄식이 내뱉어졌다. 햄스터인 줄 알았더니 여우가 따로 없다. 분위기를 있는 대로 잡아놓고 장난스레 내빼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귀여운 쪽에 가까웠지만.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순영이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지는 뒷모습에 원우는 착잡한 기분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