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원홋]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8
영업팀 전체회식은 늘 가던 식당에서 진행되었다. 익숙한 홀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순영은 입구 근처에 잠시 서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서자 비어있던 테이블이 어느정도 차기 시작했다. 인원이 많은 탓에 4인용 테이블을 여러개 붙여놓았는데 팀원이 다 오지않아 듬성듬성 빈자리가 있는 모양새였다. 그 중 3명이 앉아있는 자리를 재빠르게 찾아낸 순영은 서둘러 엉덩이를 붙였다.
[원우순영]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8
w. 소라
원우가 식당에 도착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같은자리에 앉는것만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엷게 번지는 안도감에 가방을 내려놓은 순영이 그제서야 테이블에 앉은 얼굴들을 확인한다. 맞은편에 앉은 낯익은 얼굴들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헉.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숨을 들이킨 순영의 눈동자에 당황이 스민다. 테이블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있던 원우가 순영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눈을 맞춰온다. 권대리님 오셨어요? 반갑다는 듯이 조금 높아진 목소리를 한 원우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져있었다.
“어, …네.”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던 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급하게 앉느라 테이블에 누가 있는지 차마 확인하지 못했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결국엔 옆자리에 앉게된 셈이다. 처음 떠올랐던 당황은 점차 희미해지더니 은근한 긴장으로 바뀌었다. 큼. 긴장으로 목이 꽉 막힌다. 작게 헛기침을 한 순영이 왜인지 모르게 울렁이는 속을 달래려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찬 식당에 소란스러움이 가득하다. 순영의 테이블도 그 소란스러움에 일조했다. 주로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1팀, 2팀으로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팀이라 업무에 대한 정보공유는 필수였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간다. 아무리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이라고는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싫은 것은 다들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며 반주를 곁들였다. 유리잔에 가득 차 있는 맥주를 바라보자 나직한 한숨이 튀어나온다. 딱히 마시고싶다는 마음은 없지만 안마시기에는 분위기가 흐려질 것 같았다. 아무도 순영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얀 거품이 올라와있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순영이 유리잔의 끝부분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방금 꺼내온 맥주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이 든다. 탄산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목 뒤로 넘어갔다. 반보다 조금 안되게 남은 맥주잔을 테이블위에 올려놓았다. 입술에 거품이 묻었는지 보글보글한 느낌에 엄지손가락으로 훑어내리자 액체가 되어 주륵 흘러내렸다.
“권대리님.”
“네?”
휴지를 두어장 뽑아 손가락을 닦아내는데 원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원우가 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란히 서있을때에도 나던 키차이는 앉았을 때도 나는 모양이다. 순영은 시선을 조금 올려 원우와 눈을 맞춘다. 조금 휘어진 눈을, 오똑한 콧망울을, 끝이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저도모르게 빠르게 훑어낸 순영의 시야 사이로 원우의 손이 가까워진다.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 손은 순영의 입술 경계에 내려앉았다. 엄지손가락이 순영의 윗입술 언저리를 가볍게 스쳤다. 어, 어.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순영은 당황했다. 지난번처럼 회의실이나 차에 단 둘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있는, 탁 트인 공간에서 이루어진 스킨쉽이기 때문이다.
순영의 당황을 읽은 원우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거품 묻었어요.”
“고마워요.”
순영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한 엉뚱한 생각에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화끈거리는 귀 끝을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눌렀지만 오히려 더 붉어지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둘이 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
“그러게요. 평소엔 별로 이야기도 안하더니.”
맞은편에 앉아 원우와 자신을 번갈아보는 시선에 흥미가 가득하다. 농담처럼 쏟아지는 말들에 순영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긍하기에는 친해지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부정하기에는 방금 전 원우와 지나치게 친근한 분위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원래 사람 사이라는게,”
“….”
“알게 모르게 가까워지는 거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
순영이 우물쭈물 거리며 답을 고르는 사이 원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하며 정면을 향해있던 시선이 순영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다정한 눈빛에 심장이 세게 뛰어 오르며, 조금 진정 된 것 같았던 귀끝이 다시 화끈거렸다. 담담하게 뱉어내던 말투와 저를 보던 눈빛의 온도차에 손가락 끝을, 심장 어딘가를 누군가 깃털로 간질거리는 것 같다.
잠시 둘에게 집중되었던 주제는 아까도 그랬듯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요즘 유행하고있는 이슈에 대해 운을 뗀 것은 원우였다. 아마도 둘에게 쏟아진 관심을 버거워하는 자신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이야깃거리는 자주 바뀌었다. 이따금씩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고, 연예인과 관련된 이야기, 으레 남자들이 모이면 당연히 나오는 스포츠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남자 직원들만 모인 테이블에 이성관계 이야기가 나오는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서로의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을 요구하는 말들에 순영은 애매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여자는 순영에게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영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건지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직원이 여자친구 없냐는 질문을 했다.
“혹시 모쏠?”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순영에게 또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연애 경험이 없는건 아니지만, 저들이 말하고 있는 범주는 여자에 한정되어 있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애매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도, 그렇다고 수긍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금껏 사귀어왔던 상대들을 이성으로 포장하여 대답할수도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꺼려졌다.
“설마요. 권대리도 나이가 있는데.”
“아니야. 요즘 저나이대에도 연애 못해본사람들 은근히 많아.”
“에이, 그래도 권대리는….”
맞은편에 있는 이들이 순영의 연애경험을 주제로 맞다, 아니다하는 대화를 나누며 투닥거렸다. 자신의 일이 다른사람 입에 오르락 내리락하는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꺼내는 이야기가 진위여부에 살을 보탤 것 같아 대충 흘려들으며 관심을 껐다.
“그럼 전대리는? 여자친구 있어?”
저에 대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된건지 관심은 원우에게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시선들에 당황할만도 한데 원우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니요.”
“와. 권대리에 이어서 전대리도? 여직원들 좋아하는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네.”
“그러게. 이거 소개팅이라도 시켜줘야하는 거 아니야?”
“그거 괜찮은데요?”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가만히 있는데 본인들이 더 신나서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둥,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둥의 질문이 쏟아졌다.
“얼른 말해봐. 권대리는 이상형이 뭐야?”
“딱히 생각해본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평소에 어떤사람이 좋다, 하는건 있었을 거 아니야.”
말 그대로였다. 순영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 이렇다할 기준이 없었다. 연애라는게 다 그렇듯이 적당히 만나다, 적당히 잠자리를 갖고, 적당히 헤어지는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미련을 갖는일이 없어서 그런건지 어쩌다보니 오는사람 안 막고, 가는사람 붙잡지 않는 부류가 되어있었다. 없다는 대답을 몇 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끈질기게 이상형을 물어왔다. 잠시 생각하는 듯 순영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이상형이라. 굳이 꼽자면….
“다정한 사람?”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원우를 향했다. 처음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듯이 마주치는 시선에 당황한 순영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에이 그게 뭐야.”
“좀 애매한데? 잘 챙겨주는 사람이 좋다는거야?”
“뭐 그런 셈이죠.”
대충 얼버무리듯이 대답하자 다시 관심은 원우에게 쏠린다. 전대리는 이상형이 뭐야? 떨어진 질문에 원우는 민망하다는 듯이 볼을 두어번 쓸어내리더니 힐끗 순영을 훔쳐본다. 자신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건지 고집스레 정면만 바라보는 옆모습을 한 번, 질문을 한 사원을 한 번. 음. 뜸을 들이듯 작게 신음을 내뱉다 다시 순영을 바라본다.
“쌍커풀 없고 코도 예쁘고 귀여운 사람이요. 치아가 각설탕처럼 예쁘면 더 좋고요.”
민망하다는 제스쳐와는 달리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침없었다. 구체적이라면 구체적인 대답이다. 마치 준비했다는듯 술술 나오는 대답에 당황한 건 순영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맞은편에 앉은 이들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아니, 근데 치아가 각설탕처럼 예쁘다는건 뭐야?
“전대리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네.”
고개를 끄덕인 원우가 순영을 바라보며 힘있게 대답한다. 얼떨결에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다정하게만 느껴졌다. 순영은 마음이 일렁였다. 원우의 눈을 마주하고있으면 착각을 하게 된다. 꼭 자신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심장이 떨리는 설레임을 느끼다가도 한없이 끝으로,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자신의 착각같아서. 그저 흥미 때문에 이러는거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거라면 원우의 다정을 적당히 무시해가며 신경쓰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순영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눈빛에, 말투에, 행동에 이미 마음 한 켠을 조금 내주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순영의 예상처럼 조금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렁이던 마음이 싸늘해지는건 순식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대답에 되려 흥분한 사람들이 누구냐며 캐물음에도 불구하고 원우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침전물처럼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닿을 듯 말 듯 끝이 없는 바닥으로.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순영은 화장실로 가는 대신 가게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쏟아졌다. 참아왔던 숨을 내뱉자 공기중에 섞이며 까만 밤하늘에 흩어진다. 소란스러운 가게를 뒤로하고 인적이 조금 드문 구석으로 향했다. 그래봤자 거기가 거기여서 크게 조용해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가을의 초입에 있는 날씨는 해가 지면 꽤 쌀쌀해진다. 맨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순영은 조금씩 밀려오는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다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구부린 무릎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괸채로 생각에 잠긴다. 전원우 대리의 다정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