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원순/원홋]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1

soraaaa 2016. 8. 1. 17:57









[원우순영]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1
w. 소라








- 네, 3부 끝곡으로 들으실 곡은…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간간히 울리는 사무실에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 곡은 제가 좋아하는 곡이네요. DJ가 사뭇 들뜬 목소리로 제목을 덧붙였다. 좋아서 하는 밴드의 너에게 흔들리고 있어.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멜로디가 딱딱했던 사무실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옆자리 영주씨가 아는 노래인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순영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아니. 진짜 일 안하나. 작게 중얼거리다 다시 집중하려 마우스를 움직였지만 이미 온 신경은 등 뒤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대각선에 앉은 전원우 대리에게. 



영업 1팀 전원우 대리와 영업2팀 권순영 대리는 입사 동기라 안면을 트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동갑에다가 면접도 함께 봤고,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승진해 대리라는 직함을 달았다. 이쯤되니 둘이 운명 아니냐는 사람들의 농담에 순영은 그저 멎쩍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그런가요. 제가 듣기에도 퍽 어색한 목소리로. 이런식으로 여러 일들이 겹치게 되면 친하게 지낼법도 한데 전원우 대리와 권순영 대리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영업 1팀과 영업2팀이 함께 사용중인 사무실에서는 물론이고 엘레베이터나 탕비실에서 마주쳐도 나누는 대화라곤 짧은 인사가 전부였으며,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이였다. 불편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은 관계. 그 말은 마치 전원우 대리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말인 것 같다고 권순영 대리는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불편한가?






***






아무튼 그런 전원우 대리를 클럽에서 마주쳤다. 클럽가는게 문제가 되는건가 싶겠지만 그 클럽이 '게이'클럽이라면 말이 달라지는 것 이다.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 겨우겨우 일을 끝낸 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애써 외면한 채 순영은 회사를 나섰다. 집에 들러 간단하게 끼니를 떼우고 옷을 갈아입은 후 클럽으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울리는 비트에 순영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가득찼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후치오렌지 하나 맞죠? 바(bar)로 다가가 스툴에 걸터앉자 익숙한 얼굴의 바텐더가 말을 걸어왔다. 네. 고마워요. 애교스럽게 웃음지은 순영이 건네받은 술을 한모금 마시며 클럽을 둘러봤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어지러운 조명 아래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 평소때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 그렇죠. 아무래도 금요일이니까요. 



꽤나 친근하게 말을 걸던 아까와는 달리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바텐더를 힐끔 바라보다 다시 사람들을 훑는 순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동안 일이 바빠 꽤나 쌓여있던 탓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중에 괜찮은 놈 하나쯤은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열심히 둘러봤지만 딱히 끌리는 상대가 없었다. 아, 오늘은 공쳤나.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병을 바라보던 순영이 조금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네켄 주세요. 



순영은 영업팀 직원인데 술을 싫어했다. 알콜 특유의 쓴 맛을 싫어했지만 하는 일이 영업이라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해야했다. 회식이나 거래처 접대자리에 참석하러 가는 자신의 모습은 분명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비슷할거라고 순영은 생각했다. 입사하고 처음 몇 달은 요령없이 무조건 주는대로 받아먹었다가 크게 속이뒤집어진 이후로 적당히 마시는'척'을 했다. 술자리 초반에 주고받는 몇 잔은 마시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사람들이 분별력을 잃을 즈음해서는 잔에 물을 채워넣는다거나, 식탁 밑에 버려가며 마시는 '척'을 했다. 그러다보니 항상 뒷처리는 멀쩡한 순영의 몫이었고, 이를 오해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영업 2팀 권순영대리는 말술이라고. 황당한 소문을 들은 순영은 코웃음쳤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쨌건 자신은 영업팀의 일원이였고 술을 못마신다는 소문보다는 잘 마신다는 소문이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순영이 술맛이 덜 한 후치오렌지 대신 하이네켄을 시켰다는 것은 남자 꼬시는것을 포기하고 술만 마시다 가겠다는 의미였다. 맥주를 몇번 째 시켰을까.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순영의 얼굴이 잔뜩 풀어져있었다. 적당히 취한 탓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자리 있나요? 바텐더와 의미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리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없어요. 그 짧은 사이에 상대를 훑어본 순영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상대는 꽤 괜찮았다. 얼굴도 잘생겼고 스타일도 괜찮았으며 지루하지않게 이야기를 이끌어 갈 줄 알았다. 몇 번의 스킨쉽이 오간 탓에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상대가 순영의 귓바퀴에 입술을 스치며 속삭였다. 나갈까요? 순영은 그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툴에서 일어나 출구로 걸어가는 거리가 길게만 느껴졌다. 허리에 둘러진 단단한 손만으로도 흥분돼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출구에 다달았을 무렵 생각없이 내부를 둘러보던 순영은 눈이 마주쳤다. 누구와? 영업 1팀 전원우 대리와. 순영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전원우 대리가 왜 여기에??? 하얗게 질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순영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상대가 무슨일이냐고 물었지만 순영의 귀에 닿지 않았다. 아까까지만해도 온 몸을 감싸고있던 흥분은 사라지고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 좆됐다.



결론적으로 그 날 순영은 원나잇을 실패했다. 쌓여있던 욕구에 욕구가 더해져 더 큰 욕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주말 내내 월요일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머리가 깨질정도로 고민해야했다. 월요일에 출근 했는데 사무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면? 자신이 게이클럽에 드나드는게 까발려져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강제적으로 밝혀진 후에 해고당한다면? 아냐. 재취업 할 수 있어! 그렇지만 업계에 소문이 퍼져 더이상 취업을 못하게 된다면…. 비관적인 생각을 이어가던 순영이 머리를 잡아쥔채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아! 하필 그 상황에! 하필 전원우 대리를! 밀려오는 짜증에 몸부림치던 순영이 벌떡 일어났다. 아냐! 그러고보니 전원우대리도 게이바에 있었던거잖아? 그럼 전원우대리도 게이였네! 하하! …하지만 호기심에 그냥 놀러온거면? 다시 생각해보니 헌팅하는 낌새는 없었는데. 자신은 빼도박도 못하게 원나잇하러 가는 모습이었고. 아아아... 이젠 앓다못해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뱉는 순영의 표정이 퍽 절망적이었다. 






***






그리고 지금. 그렇게나 걱정했던 월요일은 평소와 같았다. 회사 사람들은 평소처럼 저를 대했고 매일 아침마다 순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권대리 그얘기 들었어?' 라고 운을 띄우며 소문을 퍼나르는 명욱씨의 입에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않았다. 고로 순영이 게이라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영은 안도속의 불안을 느껴야만했다. 아침에 출근한 후로부터 자꾸 따라붙는 시선때문이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씹던 순영이 힐끔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전원우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왜그러는거야아..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라구..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저도모르게 울상을 짓던 순영은 문득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클럽에 나만 간것도 아니고 자기도 거기에 있었으면서! 왜 나를 벌레 바라보듯-그런 적 없음- 바라보는거야? 오른손에 쥐어진 마우스를 세게 붙잡은채 모니터를 노려보던 순영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전원우 대리와 가까워질수록 순영의 고민도 깊어졌다. 이대로 가서 뭐라 말하지? 차라리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탕비실로 걸음을 옮길까? 고민하는사이 열심히 움직인 발은 어느새 순영을 원우의 앞에 데려다주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전원우 대리와 묘하게 둘에게 집중된 사무실 분위기에 순영은 울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왔나봐.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원우 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전원우 대리님. 저랑 잠깐 이야기좀 하시죠."


 








의외로 전원우 대리는 조용히 따라나왔지만 순영은 그런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꾸만 따라붙는 시선에 짜증이 나 불러내긴 했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입밖으로 내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말해야해? 전원우 대리님 게이세요? 아니면 남자 좋아하세요? 아니 그게 그거잖아! 불러놓고 어쩔 줄 몰라하는게 다 드러나 원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언제쯤 이야기를 꺼내려나. 원우는 순영의 생각이 정리 될 때 까지 차분히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 … 지난주에.."





어렵사리 운은 띄웠지만 말을 끝맺는게 쉽지 않았다.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말 꺼내기를 어려워하는 순영을 내려다보는 원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동안 인사만 하고 지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좀 귀여운 것도 같고. 





"클럽에서 권대리님 본거요?"





원우가 아무렇지 않게 '클럽' 이야기를 꺼내자 순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ㄴ,네. 잘 들어가셨나 하고…."






잘들어갔냐는 건 왜 물어보는거야! 같이 술마신것도 아닌데! 순영은 아무 생각없이 말을 내뱉은 제 입이 원망스러웠다.






"잘 들어갔죠. 권대리님은 잘 들어갔어요?"
"네, 뭐…"





보시다싶이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순영의 시선이 원우를 빗겨갔다. 민망한듯 저와 시선을 맞추지않는 순영을 바라보던 원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거예요? 웃음기섞인 말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순영의 눈이 뾰족해졌다. 네. 그거 물어보려고 불렀네요. 저 먼저 내려갈께요. 툴툴대듯 말한 순영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원우는 웃음이 터지려는걸 애써 참으며 순영의 뒤를 쫓았다. 귀가 빨갛네.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영에게 집중됐다. 무슨일인지 호기심을 담고있는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 앉은 명욱이 순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권대리. 뭐야? 무슨일이야?"
"별 거 아니예요."
"별 거 아니긴! 딱봐도 별 거던데! 뭐야, 전대리랑 싸웠어?"
"싸우긴 뭘 싸워요. 어린애도 아니고."



수상한데. 불퉁대며 말하는 순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명욱은 때마침 들어오는 원우를 발견했다. 그래. 전대리를 캐보자! 궁금한건 죽어도 못참는 명욱은 원우를 부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순영의 책상앞에 멈춰선 원우는 파티션에 살짝 기대며 말을 걸었다. 




"권대리님."
"…네?"




갑작스런 원우의 행동에 당황한 건 순영 뿐만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명욱은 왠지 심상치않은 기류가 흐르고있다는걸 느꼈다. 야, 이러다 둘이 치고박고 싸우는거 아니야?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걸 느낀 건 명욱만이 아니었는지 사무실 또한 조용해졌다. 덩달아 긴장한 순영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원우를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왜 부르는거야? 금요일에 나 본거 이야기하려고 하는거야? 머릿속에서 생각이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표정에 훤히 나타나는 순영을 바라보던 원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점심 같이먹죠."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순영은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같이 먹자고요. 점심. 나즈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순영은 저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같이 먹죠. 점심. 할말을 다 한건지 원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 맥빠진다는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원우의 말 한마디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 했던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별 말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순영은 긴장으로 굳어있던 어깨를 늘어트렸다.